심리학

주요 심리학자-찰스 다윈(2)

허니의 세상사는 이야기 2024. 6. 4.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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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학과의 만남
흑인 해방 노예 존 에드먼즈 턴에서 동물의 박제 제작 방법을 배웠다. 이때 배운 박제제작법은 나중에 비글호의 항해에 참여해 생물 표본을 만들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2학년 때에는 플레이리스트니 협회(급진적인 유물론에 매료된 박물학 학생들의 클럽, 고대 로마의 박물학자 대 플리니우스와 연관)에 소속해, 해양 생물의 관찰 등에 종사했다. 다윈은 로버트 에드먼드 그랜트의 해양 무척추동물의 생활환경과 해부학의 연구를 도왔다. 어느 날, 그랜트는 장 바티스트 라마르크의 진화 사상을 칭찬했다. 다윈은 놀랐지만, 그 무렵 할아버지의 책을 읽어 유사한 개념을 알고 있었고, 그리고 그 생각이 논쟁적인 것을 알고 있었다. 대학교의 박물학의 수업은 지질학의 수성론(Neptunism)과 화성론(Pluton ism) 논쟁 등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지루했다. 또 식물의 분류를 배워,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많은 식물 수집을 자랑한 에든버러 대학교 박물관에서 연구를 도왔다.

진화론 연구
1836년 10월 2일 비글호가 콘월주의 팰머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다윈은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스승인 존 스티븐스 헨슬로 우가 1835년 그의 학생이었던 다윈의 편지를 모아 다윈의 지리학 편지라는 팸플릿을 만들어 배포했기 때문이다. 다윈은 서러워서 딸기에 있는 고향 집을 방문해 친척들을 만났고, 이후 식물 표본을 채취하기 위해 박물학자로 비글호에 소개를 해준 스승을 만나기 위해 케임브리지로 서둘러 갔다. 펜슬로 교수와 함께 자신이 가져온 수많은 표본을 분류하기 위해 시작했다. 그들은 다윈의 항해 기록도 정리하여 1839년에 고 출판했다. 다윈의 부친은 투자를 종용하여 그의 아들을 자선 모금을 할 수 있는 과학자로 만들었다. 흥분한 다윈은 그가 수집한 표본과 수집품을 설명해 줄 과학자들을 초청하기 위해 런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동물학자들은 저장고를 가지고 있었으며, 창고에 넣어둔 표본은 손상될 위험이 있었다.

10월 29일 찰스 라이엘은 그를 열렬히 맞았고, 곧 유망한 해부학자, 리처드 오언을 소개해 주었다. 그는 왕립 외과 대학에서 다윈이 수집한 화석 뼈 표본을 분석할 수 있는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다. 오언은 다윈이 수집한 메가테리움과 같은 거대 멸종 육상 동물들의 거의 완벽한 머리뼈 등을 보고 놀랐다. 이러한 멸종 동물들은 남미의 현존하는 개체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2월 중순 다윈은 그의 수집품을 정리하고, 그의 저널을 다시 쓰기 위해 케임브리지에서 숙박했다. 그는 최초의 논문을 썼는데, 남미 대륙이 조금씩 융기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라이엘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1837년 1월 4일 런던지질학회에 회람되었다. 같은 날, 그는 동물학회에 그의 포유류와 조류의 표본에 대해 발표했다. 조류학자 좀 굴 드는 곧 다윈이 검은 새 그로스-비트와 핀치의 혼합 종이라고 생각했던 갈라파고스 새가 사실은 핀치의 12개의 분리된 종이라는 사실을 발표했다. 2월 17일 다윈은 지질학회 평의회로 선출되었으며, 라이엘 의장은 다윈의 화석에 대한 오언의 발견에 대해서 발표했으며, 종의 지리적 연속성은 그의 동일과정설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3월 초 다윈은 라이엘의 과학 학회에 가입하기 위해 런던으로 이사를 갔으며, 하느님을 법의 프로그래머로 묘사한 찰스 바비 지와 같은 전문가와 회합했다. 새로운 종의 “미스터리 중 미스터리”에 대한 존 허셜의 편지는 특별한 기적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에서 찾은 설명과 함께 널리 토론이 되었다. 다윈은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형 해라즈머스 다윈과 함께 휘그당의 일원으로 머물렀다. 또한 인구과밀과 가난으로 복지가 희생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논쟁적인 휘그당의 〈신빈민법〉(Poor Law reforms)의 근원이 되는 맬서스의 주장을 선동했던 절친한 작가 해리엇 마니토도 그의 신념 동반자였다. 유니테리언으로서 그녀는 종의 변이를 뜻하는 급진적인 결론을 반겼다. 당시 이러한 설은 그랜트와 에티엔 조프루아 생틸레르의 영향을 받은 외과 의사들이 신봉하던 것들이었는데, 이것은 당시 방어적인 성공회 사회 질서의 아나 테마(anathema 저주)였던 것이다.

굴 드는 다윈을 만나서 각각 다른 섬에서 채집한 갈라파고스 제도의 흉내지빠귀가 변종이 아니라, 분리된 종이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다윈이 굴뚝새라고 생각했던 것도 또한 핀치류라고 알려줬다. 다윈은 섬마다 구별하여 핀치에 분류표를 붙이지 않았기 때문에 비글호에 탑승한 로버트 피츠로이를 비롯한 다른 이들의 노트에서 자료를 찾아 섬마다 종을 분리했다. 그 두 마리 레아는 또한 다른 종이었고, 3월 14일 다윈은 그들의 분포가 남쪽으로 가서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발표했다.

3월 중순경 다윈은 레아나 거대한 과나코를 닮은 이상한 마크라오 캐니 나와 같이 멸종했거나, 살아 있는 종의 지리적 분포를 설명하기 위해 “한 종이 다른 종으로 변하는 가능성”에 대해 적색 노트에서 고민 중이었다. 수명에 관한 그의 생각, 즉 무성생식과 유성생식에 대한 그의 생각을 노트 B에 7월 중순 경적게 되었다.

1838년 지질학회 서기로 선출되고 지리학자로도 활동하며 동물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이후 건강이 나빠지자 1842년에는 런던 교외에 은거하면서 진화론에 관한 자료를 수집, 정리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839년 1월 훌륭한 조수이자 외사촌 누나인 엠 머 웨지우드와 결혼 후, 탐구 여행에 관한 보고서를 출판하는 등 활발한 학문 활동을 했다. 도자기 공장을 운영하는 엠마의 집안과 다윈의 집안 모두 부유했기 때문에, 다윈은 학자로서의 연구 활동에 집중할 수 있었다. 1842년 생물계에 관한 최초의 연구서 〈산호초의 분포와 구조〉를 발표했으며, 1842년 6월, 다윈은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 이론에 대한 35쪽짜리 초고를 연필로 썼다. 같은 해에 종의 발생에 관해 착상했다. 1844년 〈화산도의 지질학적 관찰〉을 출판했고, 1846년 비글호 탐험에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남미의 지질학적 관찰〉을 발표했다. 이러한 활발한 학문 활동은 다윈 혼자서 이룬 것이 아닌, 독일어 등 5개 언어에 능통한 부인 엠마의 번역 봉사를 받아서 이룬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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